
지나간 시절의 글을 다시 보니, 나의 성장한 모습이 보인다. 과거 세상에서 말하듯이 나도 성공과 도전을 말했다. 여러 글에서 경계가 모호한 표현도 했다. 그것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질과 돈으로 한계가 정해진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경계가 허물어진 무한한 세상에 들어섰다. 하지만 아직 모호한 부분이 많다. 그래도 내가 원하던 자유로운 삶의 개념이 좀 더 명료해졌다. 흔들리지 않는 명료함으로 다가간 느낌이다. 나의 시각을 가린 안개가 점점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그러니 이제 마음에도 행동에도 더욱 자신감이 붙어가고, 세상은 더욱 확실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지금 만나는 매체를 통해 보이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 직집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언행의 모순이 명확하게 보인다. 그 무엇인가를 찾으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경계선- 물질과 돈으로 쌓은 경계선 - 근처에 간신히 도착해 삶에 대해 하는 모호한 얘기도 보인다. 보이는 것이 경계 너머라 모호하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모호함만을 보고 자신이 무엇인가 깨달았다며 사람들을 오도하기도 한다. 스스로 신이라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경계선 안에 있기에 그렇다. 넘지 않았으니 경계에 갇힌 자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그러하다고 여긴다.
나는 삶이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살면서 장애물을 만나면 그 장애물을 넘어갈 방안을 모색해 해결한다. 마련된 해결방안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 성공하면 또 앞으로 나아간다. 실패하면 다시 문제풀이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면서.
문제는 풀다보면 많은 부분이 정형화 되어 쉽게 해결된다. 하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로 방향을 달라지게 하는 개념의 정리가 있어 문제풀이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세월의 강이 길게 흐른다. 그 흐름을 따라 강변의 변화도 느끼고 즐기며 사는 맛.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삶들이 세상에 갈등을 더하니 애석하다.
자식의 문제풀이를 금지하고 자신이 해결하는 부모들이 지금의 세상에 넘치니 정말로 통탄할 일이다. 지금 구속되어 있는 정경심교수가 동생에게 보낸 "앞으로 10년 벌어서 애들 독립시키고 남은 세월 잘살고 싶다" "내 투자목표는 강남의 건물을 사는 것"이라는 휴대폰 문자가 있다고 한다. 부모가 문제해결을 해준 자식이 독립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잘 살고 싶다"하는 데 과연 잘 사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TV드라마나 영화 등이 과거 왕을 둘러싼 암투와 같은 내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암투는 이제 기업의 총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으나 내용은 같은 것이다.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 또는 행복을 위해 경쟁과 전투를 선택한 사람들. 그들이 목표를 이룬다고 행복할까?
많은 사람들이 오지않은 미래의 뭔가를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산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늘 미래를 위해 지금의 삶을 유보한다. 만족이 없는 그들은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다는 증표로 타인과 비교를 한다. 그러다가 우리 인류는 삶에 필요한 도구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비싼 차를 타며 어깨를 으쓱한다. 이른바 명품이라는 것들을 걸치고 소유하며 으쓱거린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소유하기 위해 버린 행복한 느낌과 시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알지못한 채 갖게된 죄책감과 고통, 열심히를 외치며 쓴 에너지 낭비 등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행복해야, 넉넉한 여유로움이 있어야, 고요함에 머물러야 세상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건강한 세상은 그래야 만들어진다. '강남 건물'의 소유, 자신과 자식의 화려한 스펙, 많이 가진 부와 명예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확신한다. 나아가 사회적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일단 제대로 된 성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함을 확신한다.
내게 부여된 무한한 자유로 인도하는 무소유의 삶! 나는 지금 무한한 공간으로 날아들었다. 내게 주어진 삶에 지극히 만족하면서.
visionary 이화순 lhs@visiona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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