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수확되어 텅 빈 논, 하지만 여전히 생명이 자라고 있다. 밑이 잘려나간 벼의 밑 부분에서 파란 싹이 새로 나서 자란다. 생명이 남아있으면 생장을 계속하려는 것이 바로 생명의 본능인가 보다. 싹을 내고 키우는 것이 벼의 습관적 움직임인가 보다. 자신이 수고하고 산 삶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새로운 잎을 만드느라. 사람들은 이런 것을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는 도전이라고 말한다. 삶이 끝났음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말이다.

산촌에 들어와 농사를 하고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 나이가 90이 넘은 촌로도 움직임이 어느 정도 되면 밭에서 일을 한다. 입으로는 "아이고 죽겠다"며 몸이 아프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며 움직이고, 자신의 노동으로 들어오는 수입을 움켜쥐며, 또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임에 자긍심을 가지는 듯 하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물인 돈을 대단하게 여기며 움켜쥐고 산다. 사실 돈을 제대로 써보지 못했기에 습관적으로 움켜쥐고 고단하게 사는 것이리라. 베어진 밑둥에서 새로 돋아나는 푸른 싹과 같은 모습이라 여겨진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하는 노동에 받쳐지는 에너지 소모로 자신은 삶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찬란한 가을을 즐길 여유도 없어 보인다.

도시에서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기회만 있으면 돈을 벌려고 한다. 자신이 예전과 같이 여러 곳에 여전히 돈을 써야 한다고 여기며 돈을 움켜쥔다. 이미 돈이 필요했던 자식의 교육 등에서 벗어났어도 그렇다. 삶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다. 전과 같은 습관적 행위, 노후를 위해 돈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들. 자신이 어떠한 상황이라도, 이미 수확이 끝난 벼의 밑둥처럼 새 잎을 내고 성장을 시켜야 한다고 여긴다. 자신이 삶의 과정에서 어떤 지점에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스템이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나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기본 생활비까지 계산해 놓고. 노인들을 일 같지 않은 곳에 불러내어 일이라는 것을 시키고 돈을 준다. 한 여름에 그들이 모여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는지 일정한 옷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을 본다. '노인일자리' 일 같지 않은 일, 그렇게 주어지는 돈. 나는 이러한 것들에 강하게 반대한다.

노인이 되면, 삶을 관조할 여유를 가져야한다. 고요함에 머물 줄도 알아야 한다. 산촌의 홀로 사는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나의 생각을 더욱 확실히 한다. 할아버지들은 심심해서 죽겠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몇 분의 할아버지, 그런 사람끼리 같이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고, 홀로 삶을 즐기지도 못한다.

노인은 자기 삶의 주체자가 되어 삶의 의미를 찾고, 젊어서 평생 짊어진 것들을 하나 하나 내려놓고 버리면서 가벼워져야 한다. 노인이 되면 짐을 질 기운도 줄고, 기억력도 감퇴한다. 그에 맞게 자신을 비우고 가벼움으로 주변에 적응해야 한다. '삶은 이런 것'이라고 자신이 설정한 틀에 세상을 쑤셔넣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또 비워가며 바람에 살랑거리는 자신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찬란한 가을 햇살을 즐기며 행복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알아야 한다.

무소유로 나는 산촌의 오두막에서 삶을 즐긴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나를 지켜내고, 여전히 나를 만들면서 살고 있어 기쁘다. 지극히 만족한 삶이기에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잎을 내지 않는다. 그저 있을뿐이다.


visionary 이화순 lhs@visionar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