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을 본질이라고 말한다. 존재의 본질,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공의 모습이 떠오른다. 동그란 공은 조금만 건드려도 움직인다. 구르는 공을 붙잡아 간신히 세워놓아도 잔잔한 바람에 사르르 굴러간다. 이리로 저리로 자유로이 구르는 공, 그처럼 우리네 삶도 자유로이 흐름 따라 구르는 것이 본질이 아닐까 여겨본다.
공은 비탈길에서는 정신 없이 구른다. 그러다 나뭇가지에 걸려 간신히 멈추어 선다. 멈추어 서서 주변을 구경한다. 다시 움직이고 싶으나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나뭇가지의 억압, 그러다 거센 비바람에 그 억압을 벗어나 또 구르기도 한다. 물에 쓸리어 두둥실 떠내려가며 세상을 구경하며 흐르기도 한다.
정신없이 비탈길을 구르다 멈추게 된 금산(충남)이라는 산촌에서 나의 지친 심신은 지금 쉬고 있다. 사방이 산이니 아무리 공이라도 산촌의 품을 떠나 더이상 구를 재간이 없다. 산촌이 나라는 공을 집어들고 안아주고 있다. 이제야 눈을 들어 산촌의 꽃, 나비, 벌, 새, 개울의 흐름, 흐르는 구름, 파란 하늘을 구경하고 그들의 작은 변화도 챙겨본다. 이제야 귀를 열어 물소리, 새들의 소리,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빗소리들을 들으며 그들의 작은 변화도 챙겨 듣는다. 자연에서 취도, 달래도, 머위도, 고사리도, 돌나물도, 이름은 잘 모르는 여러 먹거리를 얻어먹고 있다. 구르는 나를 멈춰세운 산촌은 나를 먹여살리고 있다.
새들의 노래소리도 자못 흥겹고 다양하게 들린다. 물까치 몇 마리가 어울려 날며 예쁘지 않은 소리를 낸다. 새소리가 좀 듣기 거북한 소리일 수도 있다는 놀라움, 신비한 파랑색의 몸통을 가진 파랑새, 신비한 파란색은 물잠자리 꼬리에서도 보이고, 여러 나비들에게서도, 물까치의 꼬리에서도 신기함으로 보인다. 빨래줄에 앉은 새 한 마리가 옆으로 톡톡 뛴다. 생경스러운 모습이다. 얼굴을 외로 꼬고 앉아있는 변색한 커다란 사마귀, 참개구리 금개구리의 펄쩍임. 스윽 스윽 움직이는 검은 독사. 가끔 창문 턱에 날라 앉아 나의 거처를 들여다 보는 새에게서 느껴지는 정겨움. 이들 모두가 마음에 훈훈함을 더한다.
철따라 베풀어지는 산촌의 신비로운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람에 굴러 새로운 세상에 온 공이라 그런 것 같다. 공이 나의 본질이기에 버티고 있던 힘을 빼니 바람이 낯선 이곳으로 나를 굴려왔다.
공이라는 나의 본질, 자유로운 존재라는 존재감을 미처 내 것으로 하지 못했을 때 나는 꼭 어떠해야 한다는 설정들을 가졌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구르지 못하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나의 모습을 각지고 모나게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대로 구를 수가 없었다.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바람결에 산촌 안에서 살살 굴러가며 사는 기쁨,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않아도 되는 기쁨, 일체의 근심과 걱정을 벗어버린 기쁨, 자연과 소통하며 느껴지는 기쁨, 자연에서 얻어먹는 기쁨, 늘 기적과 함께 하는 기쁨. 기쁨 속에 사는 만족감. 인간의 본질인 공과 같은 존재가 되어 굴러가며 느끼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다양함. 고마운 삶이다.
visionary 이화순 lhs@visiona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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