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멍때리고 산다. 그러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잘 알지 못한다. 불과 며칠 전의 어떤 일은 오래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청소하는 일이나 화분에 물주는 일은 금방 수행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한 느낌에 찬찬히 챙겨보면 어느덧 열흘이나 훌쩍 흘러 있기도 한다. 이런 일은 지금 늙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젊어서도 그랬다. 학교 다닐 때 내려야 할 버스 정거장도 지나칠 때가 자주 있었다. 멍때리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놓친 것이다.
나의 두뇌는 가끔 움직임이 정지된다. 내가 정지 시키는 것인지 두뇌가 스스로 꺼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멍때리기를 자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멍 때려야지 하는 의도가 없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멍을 때리고 있다. 그러니 두뇌가 스스로 자신의 움직임을 멈추기로 작정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멍때리고 있을 때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내려 놓는 것 같다. 늘 사유를 하며 의문의 답을찾기 위한 퍼즐조각을 만드는데 그런 작업을 두뇌가 하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 눈이 떠지면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멍때리고 있다. 이럴 때 볼 수 있는 TV프로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다. 지나치게 유치함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며 물질을 획득하고, 그것을 힘으로 휘두르며 경쟁하는 것은 마음이 싫다고 한다. 지나친 폭력이 난무하는 것도 마음이 싫다고 한다. 평소에 좋아하는 종류의 영화 등은 꺼진 두뇌를 깨운다. 그러니 그러한 프로는 두뇌가 보지 말라고 한다. 그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는 영상을 보라고 한다.
멍때리기를 유지하려는 '나', 나도 모르는 '나'는 TV채널을 돌리며 엉뚱하게 인테리어 등이 소개되는 프로에 시선을 두게 한다. 인간들이 보암직하다고 여기는 현대적인 어떤 패턴을 본다. 지나치게 중요시 되는 수납공간이 재미있다. 소유를 위한 삶에서 중요한 수납공간, 수납을 할 줄 몰라 집을 쓰레기더미 처럼 만든 사람들.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 꺼진 두뇌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 같다.
여전히 꺼진 두뇌로 나의 몸은 인적 없는 산골 길을 걷는다. 맑고 찬 공기에 나를 닦아낸다. 두뇌는 꺼졌어도 몸은 저절로 알아서 움직인다.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들도 나처럼 그들의 두뇌를 아마 끄고 있을 것이다.
나의 꺼진 두뇌는 깊은 곳에서 지금까지 내가 알아차린 퍼즐 조각들을 아마도 제자리에 끼어 맞추고 있을 것이다.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라 내 의식과 분리되어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 나는 겨울을 기다리며 난로앞에 앉아 가만히 멍때리고 있다. 내 의식에서 깊이 가라앉은 두뇌가 나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제대로 작업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visionary 이화순 lhs@visiona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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